지진의 전조

전진활동을 비롯, 지진이 발생하기 전에 일어나는 몇가지 전조현상이 임박한 지진을 예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이를 이용하여 대형 지진이 발생하기 전에 통보를 하여 주민들을 대피시키는 연구가 여러 국가에서 수행되고 있으나 아직 실용적이 되기에는 어려움이 많은 실정이다. 그림 9.1은 일반적으로 대규모 지진이 발생하기 전에 나타나는 전조현상들을 알기 쉽게 도시한 것이다.

그림 9.1 지진예보로 간주되는 물리적 현상들

그림 9.1에서 보듯이 지진현상은 다섯가지 단계로 나뉜다. 첫 번째 단계는 구조적 힘 아래에서 탄성 변형이 점차 축적되는 기간이다. 두 번째는 단층대의 암석에서 쪼개짐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전체 부피가 늘어나는 단계이다. 세 번째는 주위의 암석들로부터 미세균열과 공극을 통하여 지하수가 침투하여 불안전한 상황이 되는 단계이다. 지하수가 균열사이를 메꾸면 이 지역을 지나는 P파 속도가 다시 빨라지고 지표면이 융기하며 라돈 가스가 균열틈을 따라 방출되고 전기저항값이 낮아진다. 네 번째 단계는 지진이 일어나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이 지역에서 많은 후속지진들이 일어나는 단계이다. 그러나 모든 지진들이 이 단계를 전부 거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지진파 P파의 속도

지진이 발생하기 전에 전조로서 나타나는 P파 속도의 변화는 지진학자들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현상이 일어나는 원리는 간단하다. 지진이 발생하기 전에는 암석의 성분이 변하기 때문에 지진파의 속도도 변화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약 20km 지역에서 p파속도가 10% 정도 변화한다면 이 지역을 가로지르는 p파의 도달시간은 0.4초 가량 변화한다. 이정도의 변화는 현대의 시계 및 지진계로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지진정보는 1962년 소련의 타지키스탄 지진의 전조로서 발표된 바 있다.

지평면 수준의 변화

지진의 전조로서 나타나는 두 번째 현상은 지표가 기울어지거나 융기하는 등 수준면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일본에서 1964년 Nigata 지진때 중요한 전조로서 나타난바 있다. 그러나 1960년대 캘리포니아의 경우처럼 적어도 150km에 걸쳐 최대 35cm 정도의 융기가 관찰되었는데도 지진이 일어나지 않은 경우도 있다.

라돈 가스 방출

지진현상의 세 번째 전조는 활성단층일대를 따라 대기중으로 불활성 가스인 라돈이 방출되는 것이다. 이 현상은 구소련에서 여러 차례 보고된 바 있다.

암석의 전기저항값

관심의 대상이 되는 네 번째 변수는 암석의 비저항값이다. 실험실에서 물로 포화된 화강암등의 암석을 고압력하에서 볼 경우 파쇄부위에서 저항값이 상당히 크게 변화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소련, 중국, 일본, 미국 등의 현장실험에서도 이 현상을 계속 연구하고 있다. 앞으로 더 연구가 필요하나 현재까지의 실험결과는 고무적인 것으로 보인다.

지진활동 비율의 변화

지진활동 비율의 변화가 다섯 번째의 변수이다. 간단히 말하여 큰 지진과 작은 지진의 비율에 변화가 일며 보통 작은 지진의 횟수가 늘어난다. 이러한 변화는 1975년에 오로빌 지진과 중국 만주지진에서 관찰되었으며 1976년 9월초 이탈리아에서도 이 현상을 통하여 지진예보에 성공한 바 있다.


지진예보의 실례

1975년 2월 4일 중국 만주지역의 하이쳉(海城) 지방정부에선 이 지역에서 24시간내에 강력한 지진이 발생할 증거가 충분하다고 판단, 이 일대 도시의 주민들에게 추운 날씨였지만 건물 밖에서 거주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나서 오후 7시 36분 규모 7.3의 강력한 지진이 이 일대를 덮쳤다. 모든 기록은 이 지진이 여러 도시의 건물, 공장, 댐, 다리 등의 구조물에 미친 피해가 참혹하였음을 보고하고 있으며 이를 예상하지 못했으면 약 엄청난 사망자가 나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 당시 실제 피해상황은 사망 1,328명, 지진 후 화재 등으로 인한 부상자가 2만 6천명 정도였으며 하이쳉에서 불과 550km 떨어진 서울에서도 고층건물이 흔들리고 정전과 방송중단, 대피소동이 일어나는 등 진도 Ⅲ의 진동을 느낀 바 있다. 이 지진의 발생은 거의 수직 단층운동(dip slip)의 형태로 일어났으며 진원의 깊이는 약 12km 정도였다. 이는 전진이 530회 정도(최대규모 4.7), 본진(규모 7.3) 후 여진(최대규모 5.9)이 26만회에 달하는 대지진이었다. 이 사례는 중국정부가 자랑하는 것으로 적어도 10만명 이상의 인명을 구한 것으로 평가되며 현재까지 전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지진의 예보로서 기록되고 있다. 이 경우에 예보과정은 4단계(장기, 중기, 단기, 임진)로 나누어 전개되었다.

장기예보('66년 - '73년)

이 기간동안 지진활동 추세, 역사지진, 구조관계, 활성단층 분포, 지각구조 특징 등을 연구하였으며 화북지방의 군발지진이 발해쪽(북동)으로 이동하는 것을 발견하고 '70년 북경에서 열린 전국지진회의에서 요녕성을 중요시하기로 하고 지진예보 업무를 시작하였다.

중기예보('73년 - '74년 11월)

이 기간중에는 지진활동이 3-4배 증가하였고 지자기이상, 지경사, 지각변형(85mm)이 일어났으며, '71년부터 관측한 금현 단열대(단층)의 수위가 4-5m 정도의 변화를 보였다. '74년 5월-9월 사이에 지자기가 대련의 경우 13.5 MT 차이가 있었고 '73년과는 21.5MT의 차이를 보였다. '74년 6월 북경, 화북에서 지진활동 토론회가 있었고 여기서 뭔가 "이상함"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발해 북쪽에 진도 5-6도의 지진을 예보하였다. 이 결정을 국무원에 보고하였고 국무원에서 "69호 문건"을 하달하였다. 2천여곳에 지진전업대원과 군중을 동원하여 전조현상을 관찰하였다. 즉, 지하수위, 소용돌이, 맛, 색깔변화와 동물관측, 지전기관측 등을 수행하고 지진홍보 영화를 600여차례 상영하고 선전자료를 15만권 발부하여 자국민들에게 배포하였다. 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 3성에서 회의를 갖고 대련에서 북북동 방향에 지진을 예보하였다.

단기예보

전조현상은 압록강 하부의 단동(단동)에서 최고로 나타났다. 겨울에는 대개 물이 말라 수위가 내려가는 것이 보통이나 지하수위가 올라가고 소용돌이가 생기며 맛, 색깔이 변하고 기름이 뜨는 등 이상현상을 보였다. 또한 심양 부근의 저수지에서 '74년 12월 22일 규모 4.8의 지진과 군발지진이 발생하였다. 지진학자들 사이에도 kd관관계 문제로 쟁론이 있었으며 저수지에 집합하여 토론회를 가진 후 대지진을 예보하였다. '75년 1월에는 전국지진 토론회에서 전조, 지진활동 등을 토의하고 1월 28일에는 주변도시의 대표 등을 초정하고 회의를 갖고 거기서 지진활동을 검측하고 재해감소 등을 논의했다. 한편, '75년 6월 이전에 규모 6.0 정도의 지진이 발생할 것을 1-2개월 전에 예보하고 그 자료를 보관중이라고 한다.

임진(臨震)예보

지하수위가 현저히 증가하는 등(당일에만 447건) 거시현상이 돌출하고 동물행동에 이상을 보이는 등 전조가 뚜렷했다. 영구(영구)일대에서는 2월 1일부터 미소지진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지전기에도 아주 큰 이상을 보였다. 2월 1일 1회, 2일 7회, 3일 300회, 4일 오전 규모 4.7의 지진이 발생한 후 그날 오후에는 갑자기 지진이 정지했다. 안산에서는 온천이 흐르다 멈추었고 지하수가 하강했다. 단동에서는 얼음밑의 지하수가 몇자정도 뚫고 올라왔다. 동물 중 거위는 평소에 날지 않으나 이 날은 날아다녔고 겨울에 나비가 나왔다. 4일 한밤중 상부에 이를 보고하고 오전 10시에는 전지역에 지진예보를 발표하였다. 지방정부에서는 주민들에게 집에서 밖으로 나올 것을 홍보하였으나 영하 20도의 추운날씨에 노인들과 아이들은 나오기를 거부하여 여러곳에서 영화를 상영하고 관심을 끌게 하여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집밖으로 나오게 유도하였다. 중국의 명절인 춘절(春節)의 모든 행사를 취소하고 군인들도 연회를 취소하는 등 지진예방 활동을 하였다. 드디어 이날(2월 4일)오후 19시 36분, 규모 7.3의 대지진이 일어났다. "국가지진국"의 책임자는 나라의 영웅이 되었고 이 예보사업은 역사적으로 보존중에 있다고 한다. 이 사건은 파괴적 지진에 대한 첫 번째 완벽한 예보로서 지진학의 금자탑을 이루었으며 중국정부는 앞으로 모든 지진을 예보하겠다고 장담한 바 있다. 그러나 그후 전혀 틀린 예보도 있었다. 예를 들어 1976년 8월 광동성에서 지진예보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두달간 천막에서 지내거나 홍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결국 지진은 발생하지 않았다. 가장 치명적인 예보의 실패는 1976년 7월 27일 당산 지방에서 있었다. 이는 북경에서 150km 떨어진 공업도시로서 모든 지진학자들은 이 일대에서의 지진을 전혀 예보하지 못했다. 중국정부는 이 지진의 피해규모를 발표하지 않아지만 비공식 조사 결과 약 65만명이 사망했고 78만명이 부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북경에서도 진흙벽과 오래된 벽돌집이 무너져 약 100명이 사망했다. 여러 경황을 종합해 보건대 아직 지진을 미리 예보할 수 있는 시스템은 확보되지 않았으며 1975년 만주지진의 예보는 지진학자들의 노력 이외에도 정부의 지속적인 관심과 사회적인 정책, 분명하게 나타난 전진(前震), 그리고 다소의 행운 등이 결합되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